1988년 한 옷이 한국에 처음 나타났다. 검은 톤. 군더더기 없는 라펠. 어깨선이 떨어지는 각도가 그때까지 한국 남성복에서 흔하지 않던 형태였다. 같은 해 솔리드 옴므가 시작됐다. 그 옷은 38년 뒤인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같은 거리에서 팔린다.
한국 남성복에서 이런 문장이 가능한 브랜드는 사실상 한 곳뿐이다.
1. 1988~2026, 끊긴 적 없는 38년
솔리드 옴므는 1988년 시작된 한국 남성복 디자이너 브랜드다. 디자인은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한 디자이너가 맡았다. 그 디자이너의 이름이 우영미다. 38년 동안 솔리드 옴므는 단 한 번도 운영이 중단된 적이 없다. 시즌이 비어 있던 해도 없다. 같은 매장, 같은 매대, 같은 정체성으로 매 분기 새 컬렉션을 냈다.
이 사실이 패션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같은 시대에 함께 출발한 한국 1세대 남성복들과 나란히 놓고 봤을 때 또렷해진다.
2. 함께 출발한 1세대들이 비운 자리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은 한국 디자이너 남성복의 첫 분기점이었다. 시스템 옴므, 본, TI for men 같은 이름들이 같은 시기 같은 매대에 놓여 있었다. 38년이 지난 지금, 그중 일부는 사라졌고 일부는 다른 카테고리로 옮겨졌으며 일부는 이름은 남았으나 디자이너 브랜드의 자장 안에서 빛을 잃었다.
같은 1988년에 시작해 같은 1988년의 정체성을 같은 강도로 유지하고 있는 한국 남성복 브랜드는 솔리드 옴므 외에 사실상 없다. 이 비교가 헤리티지(heritage)라는 말의 실체다.
3. 헤리티지가 가격이 되는 메커니즘
럭셔리에서 가격은 시간을 사는 값이다. 에르메스의 가방 가격에 들어 있는 187년, 샤넬의 트위드 재킷에 들어 있는 113년, 로로피아나의 캐시미어에 들어 있는 100년. 가격을 정당화하는 시간이 가격의 뒤에 서 있다.
한국 브랜드가 명품의 가격대로 진입할 때 가장 약한 자산은 디자인이 아니라 시간이다. 디자인은 다음 시즌에 다시 만들면 된다. 시간은 다시 만들 수 없다. 솔리드 옴므가 가진 38년은, 한국 남성복에서 가격으로 환산 가능한 거의 유일한 시간 자산이다.
4. 검정·미니멀·구조 - 솔리드 옴므의 디자인 코드
솔리드 옴므의 디자인 언어는 38년 동안 거의 같은 자리에 있었다. 검정 중심의 색면.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 테일러링. 어깨, 라펠, 허리 라인의 구조를 한 번 더 그은 듯한 미세한 각도. 한국에서 '구조'라는 단어가 남성복 디자인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점이 솔리드 옴므였다.
이 코드는 매 시즌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트렌드 사이클이 두 바퀴 돌아도 솔리드 옴므의 재킷은 솔리드 옴므의 재킷으로 알아볼 수 있다.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산이다.
5. 리브랜딩 없는 지속
한국에서 30년을 넘긴 패션 브랜드 다수는 어느 시점에 '리브랜딩'을 거친다. 로고를 바꾸고 매장 콘셉트를 갈고 디자이너를 교체하며 정체성을 재설계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가 끊긴다. 솔리드 옴므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매 시즌 같은 문법을 쓰고, 그 문법 안에서 매번 다른 답을 냈다.
리브랜딩 없는 지속은 단기 지표 위에서는 비효율처럼 보인다. 그러나 38년 단위로 보면 가장 효율적인 자산 운용이다. 한 번 끊긴 시간은 가격이 되지 않는다.
6. 다음 38년을 만들 사람
솔리드 옴므 38년의 중심에는 디자이너 한 명이 서 있었다. 다음 38년의 질문은 그 자리를 어떻게 이을 것인가다. 디자이너의 가족이 메종에 들어와 디자인의 다음 세대를 함께 만들기 시작한 흐름은, 프라다와 미쏘니, 페라가모가 보여준 가문 단위 승계 모델의 한국판 첫 사례에 가깝다.
솔리드 옴므와 우영미는 한 디자이너의 두 얼굴로 시작했지만, 다음 단계에서는 두 브랜드의 분리와 통합이 다시 설계될 가능성이 크다. 그 설계가 잘 되면 솔리드 옴므의 38년은 76년이 된다.
2026년의 솔리드 옴므는 한 시즌의 컬렉션이 아니다. 한국 남성복 38년의 거의 유일한 연속선이다. 그 선이 끊기지 않는 한, 다음 한국 디자이너의 출발선은 38년만큼 앞당겨진다.
솔리드 옴므가 가진 것은 단순히 디자인이 아니다. 한 번도 끊긴 적 없는 38년의 연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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